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카를 6세]]가 죽자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 지위와 상속령과 여러 나라의 작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 6세의 [[1713년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 상속인이기는 했어도 카를 6세는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계승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주에게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첫 자식이자 유일한 아들 레오폴드가 태어나기 3년 전(당연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취한 조치였다.][* 그렇다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정치를 접해 본 경험이 완전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카를 6세는 몇 번 정도 그녀를 궁정회의에 참석시키기도 했다. 물론 상술했듯 체계적인 제왕학 수업에 비하면 이러한 그녀의 경험과 배움은 초라한 수준이었다.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체계적인 통치 교육을 시켜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회고를 남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비록 선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수장인 카를 6세의 장녀이기는 했지만, 카를 6세에게는 형인 [[요제프 1세]]가 있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사촌언니가 되는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이 본래대로라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높았다.'''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수정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이 사촌언니들의 계승권보다 우위에 서기는 했으나 전쟁으로 비화하기에는 충분한 불씨였다. 게다가 요제프 1세의 딸과 [[카를 7세|선제후]]가 혼인을 맺은 바가 있는 [[바이에른 선제후국]] 측에서는 '''무려 200년 전 [[페르디난트 1세]] 시절 작성된 문서'''까지 들고 나왔다. 오스트리아는 2~3년 전 카를 6세의 말년(1737~1738)에 치러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패배해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잃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해 [[벨그라드 조약|동남부 영토를 잃었다.]] 전쟁에서 패했고 거기서 2년밖에 안 지났으니 주변국들이 호구로 보고 뜯어먹을 구실을 찾은 것이다.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실레시아|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9살이나 연상인데다 어려서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 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군]]을 막기 어렵다고 보고 아내를 설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할라 치면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 결과를 보면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똑똑하고 재능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후계자로서의 교육이 부족했으며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 [[크리]]로 견문이 짦았던 데다 나이가 젊어서(23세) 생긴 일이다.[* 적국의 프리드리히 2세도 5살 연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로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책을 저질렀다. 자신이 친정한 첫 전투인 1741년 [[몰비츠 전투]]에서 오판을 저질렀음에도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원수가 적절히 수습해서 승리할 수 있었다.] || [[파일:external/www.museesdegrasse.com/marie-therese-presentant-son-fils-aux-hongrois.jpg|width=100%]] || 1741년 3월 13일 넷째이자 첫 아들인 [[요제프 2세|요제프]]가 태어났고, 6월 25일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넷째 이전에 낳은 세 아이가 모두 딸이라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가 적으로 돌아선 상태에 보헤미아는 배신을 때려 카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마저 동요하며 이탈할 움직임이라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기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로 달려가 의회 연설에서 장자 요제프를 선보이며 군자금과 병력을 얻어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재통합된 후 헝가리 의회는 이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던 서[[슬로바키아|북부]]나 [[크로아티아 왕국]]과는 달리 동부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크든 작든 반항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통일이 안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과단성에 감복해 왕에게 3만 명의 병력과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유의미한 사건이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은 형성되었지만 보내준다는 병력은 늦게 와서 별 도움은 안 되었고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력으로 막은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가 유일할 정도였고, 이 시기는 헝가리 귀족들의 황금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그 보답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전란으로 불타버린 [[부다페스트|부더]] 왕궁을 재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에는 [[빈(오스트리아)|빈]] 코 앞까지 당도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해 슐레지엔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 적을 하나 줄이고, 한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간 사이,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했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적국 [[작센 선제후국|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왕가를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영국과 손 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